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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화재①

세계의 대화재

유재형 기자   |   등록일 : 2020-10-23 16: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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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대화재/그림=프랑스 화가 휴 버트 로베르가(18세기 후반)]

 

인간과 불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불로 인해 인류 문명이 탄생했고 발전한 것이 사실이다불은 인간에게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에 있어 화재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양날의 검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불을 어떻게 안전하게 다루는가가 현재도 미래에도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화재(이천 물류창고 화재,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고 등)를 통해서 도시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상황이므로 도시의 화재에 대해 살펴보고, 도시는 이 화재를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며 변화됐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세계의 대화재를 살펴보면 기원후 64718일의 '로마 대화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는 시내로 번지면서 대화재로 바뀌었다. 몇 달째 가뭄으로 뜨거운 태양 빛에 달궈진 도시는 바싹 말라 있었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 빠른 속도의 화마로 휩쓸었다.

 

당시 로마는 인구 200만명의 대도시였고, 하루에도 수십 건의 작은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구조와 번영으로 인한 밀집한 인구 등, 또한 당시에는 좁고 구부러진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목조 집들은 종잇장처럼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대화재는 9일 동안 로마를 불태운 후 수그러들었다. 로마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었다.

 

대화재 당시 역사 타키투스는 '흉한들이 불을 못 끄게 막았고,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듯 횃불을 던져냈다. 이때 네로 황제는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됐으나 네로는 당시 휴가 중이었고 화재소식을 접하자마자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들을 위해 식량과 말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에 전력을 다했었다.

 

네로 황제는 화재진화 후에도 도시 재건과 화재를 대비해 건축규제 등 다양한 정책으로 구제와 화재에 대한 대책에 앞장섰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고, 이를 빌미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해 많은 소설과 영화에 묘사되기도 했다.

 

로마는 대화재 이후 집을 짓기 위해 나무 들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도로를 넓게 만들었으며 건축물들은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다시 지어졌다. 이때부터 화산재를 섞은 콘크리트가 건축자재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건축기술 덕분에 아치형과 돔 형태의 로마건축양식이 탄생하게 됐다.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했으며 건축기술의 역사를 바뀐 계기다.

 

 

[런던 대화재/그림=작가미상]

 

화재 중에서도 근대적 소방시스템을 탄생시킨 런던 대화재는 350여년 전 16669월 새벽2시에 런던교 근처 빵집에서 시작됐다. 하녀의 실수로 낸 불이 주변의 목재 건물로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했고, 이 불길은 5일간 지속되면서 런던 도시 전체 건물의 85% 이상을 소실시켰다.

 

초기 진화에 성공했다면 이처럼 큰 화재로 번지지 않았을 텐데 당시 런던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소방시스템이 없었고 민간인들이 조합의 형태로 꾸린 민영소방체계가 있었지만, 시발점이었던 빵집은 민영소방조합의 회원이 아니었던 관계로 소방조합에서 출동하지 않았었다.

 

또한, 런던시에서도 빨리 대처해 화재 주변의 건물들을 폐쇄하거나 해체해 더 이상 화재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는데 새벽에 일어난 화재에 대해서 런던 시장은 당일 저녁이 돼서야 화재 주변의 건물 해체를 명하는 등 초기 진화의 시기를 놓쳤다.

 

런던 대화재의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자연의 힘이었다. 동쪽에서 강풍이 불어와 화재가 도시 서쪽으로 급속하게 퍼지게 됐고 런던이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벽돌집보다 판잣집 수준의 목재건물들이 많았던 것도 피해를 더 키웠다.

 

결국, 이 대화재로 인해 런던의 상징인 세인트폴(Saint Paul) 대성당을 비롯해 약 13000여채의 건물이 불탔고 사망자는 최종적으로 10명 미만으로 보고됐지만, 너무 강력한 화재로 인해 시체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등록되지 않은 다수의 도시 빈민이 누락됐다는 의견도 있어 사실상 수많은 사상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형 화재로 유명한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는 “203배에 6을 더한 해에 런던은 불타 정의로운 자의 피를 요구하도다,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이 소실되리라”라고 말했고, 203배에 6을 더한 해는 66년이고 실제로 1966년에 화재가 발생했다.

 

런던 대화재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화재 방지를 위한 체계적인 방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벽돌이나 돌로 짓는 석재 건축법이 만들어졌고,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해 템즈강 연아에 집을 짓는 것을 금지했다. 이 외에도 도시건축과 관련하여 매연 및 화기를 발생하는 공장을 이전시키는 계획 등 화재예방 환경을 고려한 도시계획이 제안되기 이르렀다.

 

또한, 소방차를 갖춘 체계적인 소방시스템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으며 현대식 화재보험회사가 설립되면서 화재에 대한 대비가 강화됐다.

 

 

[시카고 대화재를 담은 인쇄물/그림=Currier and Ives 인쇄소]

 

19세기에 발생한 화재 중 가장 큰 화재는 187110월 8일 테코뱅가 137번지 개인집 헛간에서 시작된 시카고 대화재가 있다. 화재의 원인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집 헛간에 있던 소가 램프를 발로 차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설과 사람들이 모여 도박을 하다가 램프를 떨어뜨려 화재가 났다는 소문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화재는 3일간 계속되어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었으며, 시카고 중심부의 9km 지역이 초토화되었고, 오페라하우스 및 법원 등 주요건물이 대부분 타버려 도시의 3분의 1의 건물이 전소됐다.

 

화재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로는 바람의 도시로 유명한 시카고답게 도시 중심을 향한 강한 남동풍이 불고 있었고, 당시 시카고의 건물 대부분이 경골 구조(balloon frame)로 지어진 목재 건물로 이뤄져 있었으며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74일부터 109일까지 비가 고작 1인치(2.54cm) 이하로 내리는 등 매우 건조한 상태였다.

 

시카고에 세워진 건물의 3분의 2 이상이 목재 건물이었고 대부분 주택과 건물은 옥상이 가연성 타르로, 수많은 보도와 도로도 나무로 이뤄져 있었다. 이에 더해, 시카고 소방국은 말이 끄는 증기엔진 소방차 17대와 소방대원 185명만으로 도시 전체 소방을 맡고 있었고 초기 대응은 빨랐지만, 경비원의 실수로 소방관이 잘못된 장소로 달려-그동안 불이 번져 대화재가 일어난 것이다.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됐지만, 화재 이후 신속한 재건이 진행돼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 재건의 시기에 건설은 시카고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철골공법, 신건축소재 활용 등 새로운 건축공법이 다각적으로 시도됐고 고층건물이 다수 건설되면서 마천루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어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큰 경제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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